히가시노 게이고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인간의 수준에서 정의를 집행할 수 있는가? 

벌써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한 달 안에 3권을 읽어나가고 있다. 그의 글을 읽는 것보다 그를 추모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 가능하면 닥치는 대로 읽어나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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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공허한 십자가』다.  
2014년 9월에 발행됐으며 자음과모음에서 펴냈고, 번역한 이는 이선희다. 도서관에서 빌렸다. 
오래된 책이라 그런지 낡아보인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봤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히가시노 게이고
공허한 십자가. 많이 낡았다. 

왠지 "십자가" 이 단어만 붙으면 글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모든 것들이 심오해진다.  그래서 집어 올렸다. 역시 심오했다. 

이 책은 단순히 추리소설이 아니다. 우리에게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사형제도는 옳은가? 인간이 부르짖는 정의는 옳은가? 과거에 지은 죄는 드러나야 하는가? 정당한 형벌은 무엇인가? 굉장히 심오하고, 읽고 나서도 무거운 마음을 갖게 한다. 결국 추리 스릴러를 넘어 철학의 물음과 신학의 답을 찾게 만들었다. 

줄거리

살인사건 발생

나카하라와 사요코 부부는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이 이 가정에 닥치고 만다. 어린 딸이 사요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긴 재판 끝에 살인범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만, 두 부부에게 남은 깊은 상처는 그들로 하여금 이혼하게 만들고 각자는 이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또 다시 일어난 살인사건

11년 후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가던 나카하라의 전처 사요코가 길거리에서 살해를 당하고 만다. 기이하게도 살인범은 다음날 자수하지만, 나카하라는 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상한 사실을 주목한다. 사요코가 죽기 전에 '도벽'에 대해 깊이 조사하며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오키가하라 숲'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21년 전에 일어난 영아살해

이 사건을 추적하던 중에 소아과 의사 '후미야'와 그의 동창 '사오리'를 만난다. 이 둘은 고등학생 시절 실수로 임신을 한 뒤 아기를 '아오키가하라 숲'에 유기하는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그 사건 이후 후미야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아과 의사가 되어 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며 살고, 사오리는 죄책감으로 인해 삶이 엉망진창이 된다.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하고, 유흥업소에 나가며, '도벽'에 빠지고 만다. 이것으로 그는 교도소를 들락거린다. 

비극의 연속

사오리를 상담하던 사요코는 이 사실을 사오리로부터 듣게 되었고,  후미야와 사오리에게 자수를 권한다. 사요코는 철저히 사형찬성론자이다. 11년 전에 있었던 딸의 죽음 앞에 살인범에게는 사형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편에 섰다. 그런 강경함이 후미야와 사오리를 압박했다. 하지만 후미야의 장인이 이 일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을 덮으려고 사요코를 살해한다. 

무엇이 정의일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뚜렷한 대비를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과거에 큰 사건을 겪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속죄하며 각각 살아간다. 속죄의 방식이 모두 다르다. 

가령 사요코는 딸이 살해되는 사건으로 인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을 정의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작가로서 조사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사형폐지론에 적극 반대한다. 사요코에게 후미야와 사오리는 살인범이다. 정당한 죄의 대가를 받기를 촉구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이 정의요, 자기가 지키지 못한 딸에 대한 속죄의식이다. 

후미야는 자신의 21년 전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다. 그 죄책감을 속죄하기 위해 성실히 살았고,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로서 수많은 어린 생명을 최선을 다해 돌보며 살아간다. 그에게 있어서 속죄는 다른 생명을 구하며 사는 것이다. 심지어 후미야는 임신을 한 채 죽으려는 여자를 자기 부인으로 맞는다. 이것도 속죄의 행위다. 

사오리는 어떠한가? 그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저주한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배에서 나온 아이를 죽였으니 그것이 큰 정신적인 충격이 되었으리라. 마지못해 살아가며, 자신이 비참하게 죽는 것이 정의요, 그래야 자신의 죄가 씻겨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기를 갉아먹는 것이 속죄의식이다. 

사요코를 살해한 후미야의 장인은 한마디로 엉망으로 살아온 인간이다. 책임감도 없고, 성실하지 못하며 인생을 허비한 인물이다. 하지만 자기 딸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후미야가 곤란한 상황을 듣고 사요코를 살해함으로 딸과 사위의 행복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후미야는 성인이다. 자신과 자신의 딸을 구원한 구세주와 같았다. 그러기에 자신이 살인까지 저질러 가며 그들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정의고 속죄방식이다. 

가장 흔들리는 인물은 남편 나카하라다. 그도 자신의 딸의 비극적 사건으로 부인인 사요코와 마찬가지로 사형찬성론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추적하며 과연 살인범에게 사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흔들린다. 그는 후미야와 사오리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심경의 변화를 가장 많이 보인 인물이다. 

정의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때

가장 단단한 주장을 하는 이는 사요코다. 죄는 직면해야 한다. 더구나 살인범에게는 사형이 정의다. 살인범에게 무기징역과 같은 형벌이 내려졌을 때, 그들은 결코 속죄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적응하며 취미도 갖고, 나름대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속죄를 기대할 수 없다. 사형이 유일한 속죄의 방법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녀는 사오리와 후미야가 응당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의를 부르짖다가 다른 비극이 일어났다.

정의가 정의로운 결과를 갖고 오지 못했다. 정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후미야는 평생을 남을 살리며 살아왔다. 그에게 21년 전의 사건의 매듭을 요구하는 것도 정의로운 일인가? 덮는 것은 정의로운 일인가? 정의로움을 갖고 행동했는데, 결과가 정의롭지 못할 때, 인간의 수준에서 정의를 정의하고 집행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의 도약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을 이렇게 3단계로 말하고 있다. 

첫째, 심미적 단계다. 

인간이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쾌락은 오래가지 않고 더 큰 허망함에 빠지고 다시 절망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둘째, 윤리적 실존 단계

인간은 윤리적 존재이다. 인간은 주체적인 결단을 통해 보편적 윤리를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앞선 심미적 단계가 좋고 나쁜 것의 수준을 구별하는 정도면, 윤리적 단계는 옳고 그름을 따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계를 느낀다. 우리는 윤리적일 수 없다. 어기고 죄책감에 빠진다. 이런 것이 반복된다. 우리의 불완전함만을 직면하게 한다. 그래서 다시 절망에 빠진다. 

셋째, 종교적 실존 단계

죄는 그에 맞는 형벌로 씻을 수 없다. 더 높은 차원이 요청된다. 윤리적 차원의 한계를 경험한 인간은 이것을 초월한 차원을 요청한다. 죄는 더 높은 차원에서 다뤄줘야 한다. 그래서 한 인간이 주체적으로 결단한다.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길 때, 신의 사랑으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인간의 실존이라고 본다. 여기에 진정한 쉼과 안식이 있다. 


신 안에서 속죄가 가능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종교적 해법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 그저 물음표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 모두 정의를 외친다. 그런데 그 정의가 다른 비극을 낳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다. 결국 인간의 손에서 정의는 집행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부르짖는 정의도 흠결이 있고, 결과도 흠결이 있다.  

인간이 타인을 심판 할 때나, 스스로 속죄할 때 결코 완벽히 해낼 수 없다. 죄를 해결하고 덮으려고 할 때 더 큰 모순에 빠지고 만다. 정의는 인간 이성(윤리성) 안에서 다뤄지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초월성이 요청한다.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다. 불합리하다. 하지만 그 차원은 개방되어 있다. 결국 신 안에서만이 이것이 해결될 수 있다. 

필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하지 않은, 아니 말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적 영역이다. 초월성을 요청하지 못할 때는 십자가는 공허하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차원에 나를 맡긴다면 십자가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도약의 발판이 된다. 

이 소설을 소개한 많은 글을 보면 사형제도가 맞냐 아니냐를 따지고, 작가는 찬성과 폐지 무엇을 주장하는가를 본다. 하지만 작가가 맺지 못한 결론 부분을 키에르케고르를 생각하며 나름 채워보았다. 

이 소설도 일독을 권한다. 추리소설을 넘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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